* 신경림 : 1935년 충북 충주 출생. 동국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1956년 <문학예술>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는 『농무』(창비, 1975) 『새재』(창비, 1979) 『달 넘세』(창비, 1985) 『남한강』(창비, 1987) 『가난한 사랑노래』(실천문학사, 1988) 『길』(창비, 1991) 『쓰러진 자의 꿈』(창비, 1993)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창비, 1998) 『뿔』(창비, 2002) 『낙타』(창비, 2008) 『사진관집 이층』(창비, 2014) 등과, 시선집 『우리들의 북』(문학세계사, 1988) 『여름날』(미래사, 1991) 『갈대』(솔출판사, 1996) 『목계장터』(찾을모, 1999) 등, 시전집 『신경림 시전집 1ㆍ2』(창비, 2004) 외에 여러 저서가 있다. 현재 동국대학교 국문과 석좌교수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절창이다.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시. 처음 잡지에 실린 「낙타」를 읽을 때 마흔 무렵의 나는 “모래만 보고 살다가”에 꽂혔다. 보지 않는 듯하면서 다 보고 계셨구나. 십수 년이 지나 다시 시를 읽는데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이 가슴에 박혔다. 어려운 말 하나 쓰지 않고 깊은 곳을 찌르는 언어.
어떤 경지에 오른 시인만이 그런 거룩한 살인을 할 수 있다. 1990년대, 마포와 인사동 언저리에서 신경림 선생님과 어울린 적이 있었다. 술자리든 어디서든 언성을 높여 누군가와 다투는 선생님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늘 허허 웃으며 옆에 앞에 뒤에 사람과도 잘 지내시는, 한국 문단에서 보기 드문 분이었다.
시집 『돼지들에게』를 펴내며 신경림 선생님에게 추천사를 부탁드렸다. 세대는 다르나 내 시를 편견 없이 봐 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는데, 아름다운 추천사를 주신 선생님께 감사와 존경을 바친다.
최영미 시인 / 조선일보 2021, 1, 25,
문득 모래 위에 당신의 발자국 사라져 궁금했는데 낙타를 타고 가셨군요. 높은 등에서 흔들리면서 세상에서 겪은 모래알 같은 슬픔과 아픔 훌훌 털면서 가셨군요. 누군가 다시 당신을 세상에 내보낸다면 나비가 된다 하시지 않고요, 새가 된다 하시지 않고요. 꽃과 열매 만발한 곳에서 생생한 기쁨 인화해 가시지 않고요. 굳이 낙타가 되어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사시겠다니요.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가시겠다는 걸 보니 아직도 세상의 아픔과 슬픔 다 잊지 못하고 계시는군요. 모래는 모래끼리, 아픔은 아픔끼리 동무가 되는군요.
반칠환 시인 / 서울경제 2019. 11. 26.
시 '낙타'는 시집 '낙타(2008)'에 수록된 표제작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시인의 관조적 시선과 초월적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이승에서의 삶을 마치고 저승으로 갈 때 별, 달, 해, 모래밖에 본 것이 없는 낙타를 타고 가겠다고 시인은 말한다. 다시 삶이 주어져 이승으로 돌아온다면 그때는 낙타가 되어 오겠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자연 속에서 순수하게 살다가 가장 어리석고 가엾은 사람 하나 등에 태우고 저승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이 나직한 고백의 목소리, 내면화된 낮춤의 시선이 울림을 준다. 순수의 세계에 대한 갈망 배후에 숨겨졌을 삶의 질곡과 애환, 생에 서린 슬픔의 곡절들을 떠올리게 한다.
가장 어리석고 가엾은 사람은 민중을 대리하는 인물이면서 시인 자신의 초상이기도 하다. 시인은 줄곧 삶과 자아에 대한 초월적 시선을 견지하고 있지만, 그 객관적 시선 이면에 말할 수 없는 상처들이 어른거린다. 즉 낙타는 죽음의 세계로의 안내자이면서 환생하는 새 생명체로 시인의 마음 깊이 각인된 슬픔의 초월적 대상물이다.
누구에게나 삶은 끝없이 펼쳐진 사막이고, 우리는 그 광대한 모래밭을 밤낮으로 쉬지 않고 걷는 낙타와 같은 존재다. 시인은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자연 순환의 순수과정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승에서의 떠남도 저승에서의 회귀도 모두 자연의 순리고 순환인 것이다. 인간의 존재와 삶에 대한 초월적 통찰, 문명화되지 않은 순수한 삶에 대한 갈망, 현실의 고통을 낙타 이미지를 통해 반어적으로 표현한 점 등이 인상적이다. 질곡의 시대를 산 민중들의 아픔과 상처를 떠올리게 하고, 물신과 탐욕으로 물든 우리의 일상을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게 하는 시다.
함기석 시인 / 충북일보 2017.08.31
산 같은 혹을 진 단봉낙타도 선인장 같은 혹을 진 쌍봉낙타도 짐 앞에 무릎을 꿇지요. 짐 앞에 무릎 꿇는 일은 숭고하지요. 낙타는 길과 짐과 물맛을 알지요. 질기고 건조해 보이는 몸뚱이는 늘 슬픔에 젖어 있지요. '낙타표 고무신' '낙타표 성냥'은 참 그럴듯한 상표들이었지요.
죽어 낙타가 되겠다니요. 낙타가 되어 어리석은 사람의 죽음 길 동행자가 되겠다니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아, 그리하려면 가엾은 사람 모두를 살펴보아야할 텐데…. 낙타가 되어서도 시인 정신은 놓지 않겠다는 말 같군요. 길과 짐과 물맛을 아는 낙타로 환생하는 순간 다시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닌지요.
함민복 시인 / 한국일보 2011. 03. 21.
낙타
- 신경림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 <창작과비평> 2002년 겨울호 / 시집 『낙타』(창비, 2008)
* 신경림 : 1935년 충북 충주 출생. 동국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1956년 <문학예술>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는 『농무』(창비, 1975) 『새재』(창비, 1979) 『달 넘세』(창비, 1985) 『남한강』(창비, 1987) 『가난한 사랑노래』(실천문학사, 1988) 『길』(창비, 1991) 『쓰러진 자의 꿈』(창비, 1993)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창비, 1998) 『뿔』(창비, 2002) 『낙타』(창비, 2008) 『사진관집 이층』(창비, 2014) 등과, 시선집 『우리들의 북』(문학세계사, 1988) 『여름날』(미래사, 1991) 『갈대』(솔출판사, 1996) 『목계장터』(찾을모, 1999) 등, 시전집 『신경림 시전집 1ㆍ2』(창비, 2004) 외에 여러 저서가 있다. 현재 동국대학교 국문과 석좌교수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절창이다.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시. 처음 잡지에 실린 「낙타」를 읽을 때 마흔 무렵의 나는 “모래만 보고 살다가”에 꽂혔다. 보지 않는 듯하면서 다 보고 계셨구나. 십수 년이 지나 다시 시를 읽는데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이 가슴에 박혔다. 어려운 말 하나 쓰지 않고 깊은 곳을 찌르는 언어.
어떤 경지에 오른 시인만이 그런 거룩한 살인을 할 수 있다. 1990년대, 마포와 인사동 언저리에서 신경림 선생님과 어울린 적이 있었다. 술자리든 어디서든 언성을 높여 누군가와 다투는 선생님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늘 허허 웃으며 옆에 앞에 뒤에 사람과도 잘 지내시는, 한국 문단에서 보기 드문 분이었다.
시집 『돼지들에게』를 펴내며 신경림 선생님에게 추천사를 부탁드렸다. 세대는 다르나 내 시를 편견 없이 봐 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는데, 아름다운 추천사를 주신 선생님께 감사와 존경을 바친다.
최영미 시인 / 조선일보 2021, 1, 25,
문득 모래 위에 당신의 발자국 사라져 궁금했는데 낙타를 타고 가셨군요. 높은 등에서 흔들리면서 세상에서 겪은 모래알 같은 슬픔과 아픔 훌훌 털면서 가셨군요. 누군가 다시 당신을 세상에 내보낸다면 나비가 된다 하시지 않고요, 새가 된다 하시지 않고요. 꽃과 열매 만발한 곳에서 생생한 기쁨 인화해 가시지 않고요. 굳이 낙타가 되어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사시겠다니요.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가시겠다는 걸 보니 아직도 세상의 아픔과 슬픔 다 잊지 못하고 계시는군요. 모래는 모래끼리, 아픔은 아픔끼리 동무가 되는군요.
반칠환 시인 / 서울경제 2019. 11. 26.
시 '낙타'는 시집 '낙타(2008)'에 수록된 표제작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시인의 관조적 시선과 초월적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이승에서의 삶을 마치고 저승으로 갈 때 별, 달, 해, 모래밖에 본 것이 없는 낙타를 타고 가겠다고 시인은 말한다. 다시 삶이 주어져 이승으로 돌아온다면 그때는 낙타가 되어 오겠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자연 속에서 순수하게 살다가 가장 어리석고 가엾은 사람 하나 등에 태우고 저승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이 나직한 고백의 목소리, 내면화된 낮춤의 시선이 울림을 준다. 순수의 세계에 대한 갈망 배후에 숨겨졌을 삶의 질곡과 애환, 생에 서린 슬픔의 곡절들을 떠올리게 한다.
가장 어리석고 가엾은 사람은 민중을 대리하는 인물이면서 시인 자신의 초상이기도 하다. 시인은 줄곧 삶과 자아에 대한 초월적 시선을 견지하고 있지만, 그 객관적 시선 이면에 말할 수 없는 상처들이 어른거린다. 즉 낙타는 죽음의 세계로의 안내자이면서 환생하는 새 생명체로 시인의 마음 깊이 각인된 슬픔의 초월적 대상물이다.
누구에게나 삶은 끝없이 펼쳐진 사막이고, 우리는 그 광대한 모래밭을 밤낮으로 쉬지 않고 걷는 낙타와 같은 존재다. 시인은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자연 순환의 순수과정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승에서의 떠남도 저승에서의 회귀도 모두 자연의 순리고 순환인 것이다. 인간의 존재와 삶에 대한 초월적 통찰, 문명화되지 않은 순수한 삶에 대한 갈망, 현실의 고통을 낙타 이미지를 통해 반어적으로 표현한 점 등이 인상적이다. 질곡의 시대를 산 민중들의 아픔과 상처를 떠올리게 하고, 물신과 탐욕으로 물든 우리의 일상을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게 하는 시다.
함기석 시인 / 충북일보 2017.08.31
산 같은 혹을 진 단봉낙타도 선인장 같은 혹을 진 쌍봉낙타도 짐 앞에 무릎을 꿇지요. 짐 앞에 무릎 꿇는 일은 숭고하지요. 낙타는 길과 짐과 물맛을 알지요. 질기고 건조해 보이는 몸뚱이는 늘 슬픔에 젖어 있지요. '낙타표 고무신' '낙타표 성냥'은 참 그럴듯한 상표들이었지요.
죽어 낙타가 되겠다니요. 낙타가 되어 어리석은 사람의 죽음 길 동행자가 되겠다니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아, 그리하려면 가엾은 사람 모두를 살펴보아야할 텐데…. 낙타가 되어서도 시인 정신은 놓지 않겠다는 말 같군요. 길과 짐과 물맛을 아는 낙타로 환생하는 순간 다시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닌지요.
함민복 시인 / 한국일보 2011. 03. 21.
시집의 맨 앞에 배치된 표제시 〈낙타〉는 이 노시인의 시선이 어느덧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보게 되었음을 알려준다. 살아온 날에 비해 살아갈 날이 줄어들수록 '죽음 이후'에 대한 관심이 느는 것이야 당연하다면 당연한 노릇이다. 이 시에서 흥미로운 것은 생략된 주어 '나'가 낙타를 타고 저승에 갔다가는 그 자신 낙타가 되어 이승으로 오며, 다시 저승으로 갈 때에는 다름아닌 '나'로 짐작되는 사람을 등에 태우고 가겠노라는 윤회전생적 순환구조에 있다. 삶과 죽음, 인간과 동물, 주체와 객체의 분별이 지워지는 깨달음의 경지가 참신한 상상력에 얹혀 노래된다.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주체이자 수단으로서 낙타라는 낯선 동물이 등장하는 것도 흥미롭다. 그것은 아마도 이번 시집에서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는 시인의 여행 체험과 관련 있는 것 아닐까. 시집에는 터키와 네팔, 콜롬비아에다 평양과 개성까지 부지런히 다닌 시인의 행적이 뚜렷하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 한겨레 2008. 02. 22.
이 시를 접할 때마다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을 보고 살다가 삶을 마감하는 낙타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곤 했다. 낙타는 새들의 지저귐을 간직한 신비의 산도 에메랄드빛 환상의 바다도 휘황찬란한 빌딩 숲도 경험해 보지 못하고 삶을 마감한다. 단조롭고 따분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낙타가 그저 애처로워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은 행복의 기준을 남들과의 비교우위에서 찾으려고 한다. 부러울 만큼 승진을 해도 자리가 있는 한 끝없이 계속 올라가야만 직성이 풀린다. 평생 먹고 남을 재산을 벌었어도 탐욕은 멈출 수가 없다. 명품으로 치장하고 현란한 삶을 살지만 늘 불안하고 불만 가득하다.
느릿느릿 내딛는 낙타의 걸음에서 느껴지는 평화로움은 찾아볼 수가 없다. 행복을 외형의 화려함에서 찾는 한 낙타의 삶은 늘 불쌍하게만 보인다. 그러나 행복을 내적 충만이나 자기만족에서 찾는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사막은 쓸쓸하고 황량해 보인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화려한 불빛 대신 오염되지 않은 달과 별과 해를 볼 수가 있다. 휘황찬란한 도시에서는 빌딩 숲에 가려져서 볼 수가 없었던 원시적 아름다움이 맑고 밝게 빛난다. 증오와 배신, 갈등과 다툼, 음모와 복수도 없다.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현란한 피로도 모두를 쳐부숴야 하는 경쟁상대로 보라는 가르침도 없다. 오염되지 않은 영혼 그리고 자연의 순수가 살아 숨 쉰다. 느림과 고행의 상징처럼 보이는 낙타지만 실은 상처받지 않고 축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낙타를 불쌍하게 보겠지만 낙타는 도리어 사람들을 불쌍하게 본다.
대부분 장미로 덮인 꽃길만을 부러워한다. 돈 많고 출세만 하면 성공한 삶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진탕에 빠지고 먼지를 덮어 쓰던 그 지긋지긋하던 시절에 오히려 삶이 깊어진다. 힘겹게 부둥켜안던 체온이야말로 가장 따뜻한 행복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계산된 화려함보다 소박한 정겨움이 오래 기억되고 그리움 짙다. 신경림 시인은 1970년대 안양 비산동에서 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내를 모두 잃었다. 아버지는 중풍으로, 할머니는 치매로, 아내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찰기관에서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형사가 그의 동태를 살피러 출근하는 바람에 다니던 출판사마저도 그만두어야 했다. 집안의 조사에 실직까지 겹친 최악의 시절이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암울했지만 희망이 있었고 핍박이 심했지만 그럴수록 들떠서 활기가 넘쳤다고 한다. 진정한 행복은 끈끈한 속정을 나눌 수 있는 그 시절에만 맛 볼 수 있다. 잘남과 화려함, 오만과 독선은 행복처럼 보일 뿐이지 결코 행복을 담보해 주지는 못한다. 남들과의 비교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충실해야 한다. 몸과 마음을 옭아매는 그 모든 소란함에서 벗어날 때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나무처럼 가식 없이 곁에 있어주고 즐거움과 위로를 함께하던 그 순수함이 오래 기억되고 간절함 깊다.
필자는 글 쓰는 법을 배워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권의 책을 내고, 또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이것은 촌 동네에서 낙타처럼 살았던 어린 시절이 준 선물이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포장도 되지 않은 2km 흙길을 단조롭게 반복하여 오가기만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그 길에서 이후 고속도로나 비행기 항로를 다니며 보았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았다. 송구와 가재로 주린 배를 채우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차가 지나간 후 흙먼지를 뒤 집어 쓰면서도 정겨움이 있었다. 손자가 올 때를 기다려 화로에서 구워 주시던 할머니의 고구마 맛은 지금도 눈물이 난다. 여태껏 그 어떤 비싼 음식도 그 고구마보다 나를 더 행복하게 해 준 음식은 없다. 볼품 없고 고단했지만 제사를 지내면 음복을 돌렸고, 아픈 이웃이 있으면 보리밥과 김치를 몰래 가져다 놓았다. 사람답게 사는 이치를 낙타처럼 살았던 그 시절에 체득했다. 곤궁했던 시골의 삶이 광채 나는 명패를 내걸었던 도시의 삶보다 더 큰 스승이었고 더 축복받은 시간이었던 것이다.
누구나 화려한 삶을 꿈꾼다. 그러나 부잣집 화단의 장미라서 더 아름답고, 들판의 민들레라서 덜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지는 꽃도 꽃이고 백합도 할미꽃도 다 꽃이다. 즐거운 삶도 삶이고, 서러운 삶도 삶이다. 재미만을 추구하는 것도 삶이고, 깊이 성찰하는 것도 삶이다. 마음의 평화와 내적 충만을 얻을 수만 있다면 모든 삶이 다 아름답고 훌륭하다.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을 보다가 삶을 마감한다 해도 그 누구보다 행복할 수 있다.
얼마 전 딸아이가 식당에서 힘겹게 아르바이트를 해서 벌은 돈이라며 30만원을 내밀었다. 그 30만원이 회사 다닐 때 받던 천만원 월급보다 더 행복했고 더 소중했다. 돈이 전부인듯 하지만 삶에는 돈보다 귀중한 것이 있다. 가졌다고 교만할 것도, 가지지 않았다고 비굴할 것도 없다. 피는 꽃마다 다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주어진 순간, 주어진 곳에서 내 소리로 내 색깔로 당당하게 빛나면 된다.
황태영 수필가 / 독서신문 2015.03.16 ‘낙타는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별과 달과 해와/모래만 보고 살다가/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등에 업고 오겠노라고/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길동무 되어서" 신경림의 시 '낙타'의 마무리 대목이다.
그는 세상을 하직하는 날, 낙타를 타고 떠나겠다는 19세기 탐험가 같은 유언을 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노시인의 문학적 발언이지, 죽기 전 중앙아시아 어디쯤에서 괜찮은 낙타 한 마리 미리 알아보겠다는 뜻은 아니다. 살아생전 힘차게 달리던 맥 어느 세월 자기도 모르게 잃고 흰 상여에 떠 매여 가는 것도 아니고, 남아있는 제 힘으로 이 범상치 않은 등의 곡선을 가진 이국의 동물 위에 올라타겠단다.
이만하면, 삶의 마지막 여정이 그리 수척하지 않고 홀로가 아니다. 세상에 다시 태어나면 낙타가 되어 가장 어리석은 누군가의 길동무되어 가겠노라 밝힌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낙타일까?
대상(隊商) 카라반은 그림자 하나로도 모래벌판의 완벽한 풍경화를 만들어주는, 목이 길지만 슬프지 않고 눈빛 너그러운 이 짐승이 아니고는 상상할 수 없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인간이 낙타에서 사자, 그리고 어린 아이로 가는 초극(超克)의 과정을 설파한다. 자기 짐도 아닌 것을 강제로 지고 가는 낙타는 노예의 단계이고, 이를 극복해야 자유의 주인인 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자는 자유를 위한 싸움의 긴장에서 영원히 풀려날 수 없다. 정신의 평화는 아직 획득되지 못한 것이다. 어린아이는 이 모든 것에서 해방된 존재 자체를 상징한다.
흥미롭게도 '짜라투스트라'는 '낙타를 모는 사람'라는 뜻이다. 그가 창시자가 된 조로아스터교는 어두운 세상에 불을 밝히라는 하늘의 뜻을 선포한 종교다. 그 이름대로, 고집 센 야생낙타를 길들여 사막에서 인간의 길동무가 되어가도록 하는 그 오랜 시간은 낙타의 인내와 수고, 그리고 희생과 수없이 마주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니체가 본 것과는 다르게 노예가 아니라, 때로 절망스럽고 처절한 시간을 인간과 함께 해준 존재로서 말이다.
바람이 몹시 불던 날, 타림분지 너머 고비 사막 언저리를 잠시나마 밟게 해준 낙타가 떠오른다. 말의 해라고 하는데, 난데없이 낙타를 떠올린 까닭은 달리 있지 않다. 혹여 인생의 사막을 만나도 마음속에 낙타 하나 함께 하면 갈 길이 막막하다고 쉽게 지치거나 외롭지 않을 것이다.